#1. 1910년 한일합방조약을 맺기 직전 열린 어전회의에서 순종은 조약문서에 옥새를 찍으라는 친일파들의 압력을 받고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병풍 뒤에는 순정효황후 윤 씨가 있었다. 윤 황후는 병풍 뒤에서 뛰쳐나와 옥새를 집어 들어 치맛자락에 숨겼다. 여염집 여자의 치마에 손대는 것조차 어려웠던 시절에 감히 황후의 치마를 들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신하들이 당황하자 황후의 숙부인 윤덕영이 달려들었다. 그는 옥새를 빼앗아 합방조약체결문서에 찍도록 하였다. 국권을 뺏기는 비극의 마지막 절차는 문서에 옥새를 찍는 것으로 끝났다. 이른바 경술국치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옥새 등 황실 도장을 일본으로 보냈다. 옥새를 가지고 주권 행사를 기도할까 봐 아예 멀리 일본으로 보낸 것이었다.
#2. 2019년 4월 국회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도장을 보관 하고 있던 홍진 선생의 손부 홍창휴 씨가 100년 전 만들어진 도장을 국회의장에게 전달하는 의식이 있었다. 이 도장은 임시정부의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이 수립된 1919년 4월부터 광복 이후 1945년 8월 22일까지 공식 문서에 사용됐다. 1973년 미국으로 이주한 홍 씨는 남편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미국으로 유학 생활을 하면서도 늘 몸에 지녔다”라며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베개 안에 숨기고 잠을 잤다”라고 했다.
국회 관계자는 “임시정부의 공식 관인은 해방 직후 국내에 들어왔으나 6. 25전쟁 당시 분실되어 행방이 묘연한 상황”이라며 “현재 확인된 유일한 임시정부 관련 공식 인장은 임시의정원 관인뿐인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설명했다. 비록 작은 도장이지만 임시의정원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산이다.
#3.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때였다. 한 정당의 대표가 공천에 대한 불만으로 공천추천장에 대표의 직인 날인을 거부한 사태가 있었다. 당대표가 지역구에 내려가니 추천장에 당인과 당대표 도장을 찍을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도장은 있었지만, 당대표의 허락 없이는 도장을 찍을 수가 없었으므로 도장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른바 ‘옥새 파동’이 일어났다. 눈앞에 두고도 가볍게 찍을 수 없는 것이 도장이다.
#4. 충북 C시에서는 지역 택시 이용을 확대한다는 명분으로 관내에 있는 교육기관에 ‘교육생들의 카풀 금지 지도와 전세버스 운영을 자제해 달라’라는 공문을 보냈다가 물의가 빚어졌다. 이에 시에서는 ‘학교와 교육생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라고 발표하는 일이 있었다. 단편적인 판단으로 시장 직인을 찍어 보낸 공문서가 우스운 꼴이 되었다.
얼마 전, 서산시의회가 의장 명의로 (가칭) 초록 광장 조성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기지방재정계획 반영과 관련한 공문을 행정안전부, 국민권익위원회, MBC 등에 발송했다. 이에 의회가 대외적으로 공식적인 의견을 표명할 때 정식 의결 절차를 거치지 않은 것이 적정한지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그 후 의회는 이 공문이 시의회 공식 의견이 아니라는 번복 공문을 발송했으니, 대내외적으로 위신이 크게 실추됐다는 비판이 따랐다.
행정에 ‘종문주의(從文主義)’라는 말이 있다. 행정행위는 문서에 의한다는 의미다. 공문서는 결재권자가 해당 문서에 정해진 절차를 거쳐 날인 또는 서명함으로써 성립하고 직인이나 관인을 찍음으로써 대내외적으로 효력이 발생한다. 최근에는 SNS 형식 등으로 통지하기도 한다. 행정기관의 행정업무 운영에 관하여 대통령령인 ‘행정업무의 운영 및 혁신에 관한 규정’이 있다.
이에 따르면 ‘문서의 발신 명의는 행정기관의 장으로 한다. 다만, 합의제기관의 권한에 속하는 문서의 발신 명의는 그 합의제 기관으로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에서 기관장을 정점으로 계선 조직을 두는 독임제(獨任制)기관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혼선을 주는 것은 의회, 위원회, 회의 등 합의제(合議制)기관이다. 행정업무규정에 ‘합의제기관의 문서 발신 명의는 그 합의제 기관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내부 의사 결정 과정과 발신 명의에 관하여 명확하게 명시하지 않고 있다.
즉, 전체 구성원의 의결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 의장, 위원장 등 대표자의 결정 또는 결재로 성립되는지 모호하다. 나아가 합의제 기관에서 대외적으로 공문서를 보낼 때 ‘의회’, ‘위원회’ 등 기관명만 표기하는지, 의회 의장, 위원회 위원장 등 직위를 표기하여야 하는지 또는 대표자의 이름까지 써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국회도 통일되지 않은 실정이다. 성립 절차와 발신 명의 등 사안에 따라 규정하여야 할 필요가 있다. 이에 관하여 행정업무규정 소관부처로부터 유권해석을 받아 혼란을 줄여야 할 것이다.
공적은 물론이고 사적으로 도장이 갖는 의미와 기능은 막중하다. 합방문서에 옥새를 찍음으로써 국권이 상실되는 것처럼 도장은 국가의 권리와 정통성을 상징한다. 국가기관이나, 지방의회를 포함한 지방자치단체도 마찬가지다. 공문서에 관인이나 직인을 찍는 일을 할 때에는 그 엄중함을 확고하게 인식하고 책임과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전 서산시 부시장